가장 최근에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극장에서 직접 보고 왔습니다. 일반적으로 역사 영화는 결말을 이미 아는 상태에서 보게 되지만, 그럼에도 극장을 나서며 가슴이 먹먹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왕과 사는 남자를 보고 나서 꽤 오랜 시간 그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예고편을 통해 대략적인 스토리를 짐작했지만, 실제로 스크린에서 마주한 이 영화는 제 예상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다가왔습니다. 단종의 비극을 다룬 작품이라는 점에서 슬픈 결말을 각오했지만, 이 영화가 보여준 감정의 결은 단순한 역사적 비극 이상이었습니다.
소시민 촌장의 변화
영화는 강원도 영월 산골 마을 광천골의 촌장 엄흥도가 마을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유배지를 유치하려는 현실적인 욕망에서 시작합니다. 일반적으로 사극 속 충신은 처음부터 의로운 인물로 그려지는데, 이 영화의 엄흥도는 달랐습니다. 유해진이 연기한 엄흥도는 거창한 충성심과는 거리가 먼, 그저 마을을 위해 실리를 챙기려는 평범한 촌장이었습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약간의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영화 초반 엄흥도와 단종 사이에 깊은 유대감이 형성되기 전인 것 같은데, 갑자기 그가 목숨을 걸고 단종을 지키는 충신이 되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는 차라리 엄흥도를 처음부터 마을을 위해서라면 헌신하고 희생하는 캐릭터로 설정하고, 유배 온 단종에게서 자신의 아들 태산의 모습을 발견하며 연민을 느끼는 방향으로 전개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영화는 두 사람이 함께 호랑이를 상대하고, 활쏘기로 경쟁하며, 서로의 입장을 이해해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엄흥도가 단종의 시신을 강에서 건져 올리는 마지막 장면은 초반 진상품을 강에서 건져 올리던 장면과 대비되며 그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다만 저는 그 변화의 과정이 조금 더 세밀하게 그려졌다면 감정이입이 더 깊어졌을 것 같은 아쉬운 마음이 조금 들었습니다.
실제 역사와 영화적 상상력
왕과 사는 남자는 실존 인물인 단종과 엄흥도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지만, 영화적 각색이 상당 부분 들어갔습니다. 실제 역사 기록에 따르면 엄흥도는 영월 지역의 호장으로 향리 중 우두머리였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그를 평민 촌장으로 설정해 관객이 더 쉽게 공감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한명회의 캐릭터도 흥미로운 지점입니다. 일반적으로 한명회는 얇고 가벼운 책사 이미지로 그려져 왔는데, 유지태가 연기한 한명회는 실제 사료 속 기록처럼 기골이 장대하고 위압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 상당히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동안 드라마나 영화속에서 그려진 한명회라는 인물과는 너무나 달랐고, 100kg에 가까운 체격으로 나지막하면서도 우렁찬 목소리로 단종을 압박하는 한명회의 모습은, 세조가 직접 등장하지 않음에도 그 시대의 무자비한 권력을 충분히 느끼게 했습니다.
단종의 최후 역시 영화적 해석이 가미된 부분입니다. 실록에는 단종이 자살했다고 짧게 기록되어 있지만, 이는 승자의 기록일 뿐이기 때문에 전문가에 따르면 어떤 죽음이었는지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영화는 금부도사 왕방연의 갈등과 엄흥도의 시신 수습 일화를 엮어, 단종의 마지막 존엄을 지켜주려는 엄흥도의 선택을 보여줍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며 차마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문밖에서 바라보는 시선으로 처리한 연출과 유해진 배우의 열연이 너무나도 돋보이고 더 큰 슬픔을 전달한다고 느꼈습니다.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메시지
영화를 보고 나오며 저는 장항준 감독의 인터뷰 내용이 계속 떠올랐습니다. 감독은 "지켜주지 못한 정의, 실현되지 못한 정의에 대해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잊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제 경험상 역사 영화를 볼 때 결말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몰입을 방해할 때가 많은데, 이 영화는 달랐습니다.
엄흥도가 목숨을 걸고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는 장면은 단순한 충성심을 넘어선 인간적인 예우였습니다. 세조의 서슬 퍼런 칼날 아래에서도 왕의 시신을 버려둘 수 없다며 강으로 뛰어드는 모습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깊은 존중이었습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며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은 기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 속 단종은 사약을 거부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선택을 합니다. 이는 세조를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마지막 저항이었습니다. 박지훈 배우가 15kg을 감량하며 만들어낸 버석한 입술과 생기 없는 눈빛은, 모든 것을 잃은 어린 왕의 처절함을 생생하게 전달했습니다. 저는 그의 연기를 보며 역사책 속 한 줄로 기록된 단종의 죽음이 얼마나 무거운 것이었는지 새삼 깨달았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나니 실제 단종의 무덤인 영월 장릉과 유배지였던 청령포에 꼭 한번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영화 관람 후 촬영지를 찾는 것이 단순한 관광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이번만큼은 다릅니다. 수백 년 전 차가운 남한강에 던져졌던 왕, 역사속에 한줄로만 기족된 어린 왕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는 마음이 저절로 생겼습니다. 영화가 던진 메시지처럼, 잊지 않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참고: https://namu.wiki/w/%EC%99%95%EA%B3%BC%20%EC%82%AC%EB%8A%94%20%EB%82%A8%EC%9E%90